요한 크루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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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네덜란드의 前 축구인.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안티 테제로, 축구 선수와 축구 감독으로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다.[5]
선수 시절, 클럽에서는 토탈 풋볼의 아버지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이끄는 아약스의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1971-72 시즌 트레블[6] 을 포함해 유러피언컵 3연패와 에레디비시 8회 우승을 이끌었고, 바르셀로나로 이적해서는 14년 만의 라리가 우승을 달성했다.[7] 국가대표팀에서도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미헬스의 토탈 풋볼을 구현하고 준우승을 일궈냈다. 또한 발롱도르를 세 차례 수상하며, 미셸 플라티니, 마르코 반 바스텐과 동률을 이루고 있다.[8]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서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구단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과 라리가 4연패를 이끌었으며, 라 마시아를 개편하고[9] 자신의 축구 철학을 도입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바르셀로나식 축구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10]
한편 그가 선수 시절에 아약스에서 달았던 등번호 14번은 현재 아약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11]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요한 크루이프는 10세일 때부터 아약스 유소년팀에서 성장했고 1964년 에레디비시에서 데뷔하여 데뷔전부터 득점을 올리는 등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하지만 아약스는 13위에 그치고 만다. 이후 자신의 영원한 은사인 리누스 미헬스를 만나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해 25경기에서 23골을 넣고 KNVB 베이커 결승전에서는 혼자 4골을 넣어 7:0 대승을 이끄는 등 괴물같은 모습을 보였고, 그 다음 시즌에는 46경기 33골을 기록하며 아약스의 에레디비시, KNVB 베이커 더블을 이끌었고 1969년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결승에서 AC 밀란을 만나 밀란의 피에리노 프라티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으며 4:1로 패배하며, 우승을 AC 밀란에게 내주었고 리그에서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1975년에 이르러 은사인 미헬스가 감독 자리에서 사임한 뒤 크루이프에게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11년 동안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지휘하면서 3번의 리그 우승과 1975년 UEFA컵 우승을 이끈 명장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이 취임했다. 바이스바일러 감독은 전술적으로 많은 변화를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크루이프를 측면에 기용하려 한 지시 때문에 마찰이 생겼다. 세비야와의 경기 도중 교체된 크루이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이스바일러 감독과 충돌했다. 그러나 엘 클라시코에선 안방 2:1, 원정 2:0으로 이기면서 자존심을 세웠다. 이때 동료인 카를레스 렉샤흐도 탁월한 기량을 과시했으나 1975/76 시즌 라리가 우승은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또 뺏기면서 준우승에 그쳤고, 바이스바일러 감독 역시 시즌이 끝나갈 즈음인 1976년 4월에 경질되었다.
이후 라우레아노 루이스 감독대행을 거쳐 친정인 아약스에서 감독을 하던 미헬스 감독이 돌아오면서 은사와의 눈물의 상봉을 거둔 크루이프는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비록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승점 1점이 뒤져 라리가 타이틀 탈환은 실패했지만 1976/77 시즌 동안 크루이프는 엘 클라시코에서 두 번 다 득점하여 1승 1무로 우위 전적을 만들었다.
경기력은 바르사가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그해에 크루이프는 라리가에서 14골을 기록하며 줄어든 득점력을 회복했다. 1977/78 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은 들었지만 엘 클라시코에서 2연패를 당해 라리가 우승을 날려먹으면서 용납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따라 미헬스 감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또 다시 사임 수순을 밟았고, 애제자인 크루이프 역시 계약이 만료되자 바르사를 떠났다.
이대로 가면 명예롭게 은퇴하는가 했으나, 사기당해 전 재산을 날려 먹으면서[17] 돈을 벌려고 선수로 복귀, 1979년 7월 은사인 미헬스가 감독이었던 미국 북미 축구 리그 로스엔젤레스 아즈텍스와 계약하면서 미국에서 뛰게 되었다.
1980년 미국 북미 축구 리그 워싱턴 디플로매츠에서 뛰다가 1981년 2월 스페인 레반테 UD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1981년 6월 다시 미국 북미 축구 리그 워싱턴 디플로매츠에 입단하였고 1981년 12월 네덜란드 아약스로 돌아와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시절 아약스 소속으로 PSV 에인트호번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던 허정무와 맞대결이 있었는데 허정무가 그의 마크맨이었다.[18][19] 1984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축구화를 벗었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66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데뷔한 크루이프는 곧 맹활약하여 주전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유럽 예선에서 탈락하여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했다.[20]
하지만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미헬스를 감독으로 임명했고 이후 크루이프를 비롯한 요한 네스켄스, 로프 렌센브링크, 뤼트 크롤 등 쟁쟁한 선수들을 모으고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토탈 풋볼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는데 1차 조별리그 3조에서 우루과이를 2:0으로 격파, 스웨덴이랑 0:0 무승부, 불가리아를 4:1로 격파하여 2차 조별리그에 진출해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는 크루이프 본인이 멀티골을 넣는 등 4:0으로 압승을 거두었고 동독을 상대로 2:0,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상대로 네스켄스와 크루이프가 골을 넣으며 2:0으로 승리하며 결승까지 안착했다.
처음엔 원래 축구 변방이었던 네덜란드를 무시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본선에서 네덜란드가 토탈 풋볼로 눈부신 경기력을 선보이자 네덜란드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1974년 네덜란드가 토탈 풋볼로 유명해지기 직전, 세계 축구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은 바로 서독이었다. 서독은 유로 1972에서 화려한 패싱 플레이를 펼치며, 잉글랜드(3:1), 소련(3:0) 등 다른 우승 후보들을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하여 '람바참바 풋볼'이라는 찬사를 받았었다. 1972년 발롱도르에서 서독 선수들이 1~3위를 독식할 정도였다. 당시 서독의 화려한 플레이는 유럽팀도 브라질 같이 아트사커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격이라 당시 유럽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었다. 그러나 유로 1972 우승 이후 서독의 헬무트 쇤 감독은 브라질과 같은 남미 강호들이 가세하는 월드컵에서 확실하게 우승을 거머쥐기 위해 대표팀의 색깔을 대대적으로 바꾸었다.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같은 아트 사커로 맞불을 놓기보다 독일의 장기인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수비와 조직력 위주의 축구로 회귀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쇤 감독은 패스마스터 귄터 네처를 빼고 전사 볼프강 오베라트를 중원 플레이메이커로 기용하는 등 대표팀의 색깔에 변화를 주었다. 허나 그 결과 1974년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은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실리적이고 재미없는 축구를 구사했고, 게다가 조별 본선에서 동독에게 패하면서 우승후보로서의 자존심을 구겼다. 그러자 사람들의 관심은 화려한 토탈 풋볼을 구사하며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강호들을 잇따라 무실점으로 격파하던 네덜란드에게 쏠렸다.
1974년 월드컵을 앞두고 서독의 쇤 감독이 잘나가던 서독 대표팀에서 화려함을 지우면서 팀 컬러를 바꾼 것은 브라질 같이 개인기가 뛰어난 강호를 상대로 확실하게 승리를 가져가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서독의 이러한 전략은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입증되었다. 결승전에서 서독의 쇤 감독은 찰거머리같은 대인 방어 능력을 보유한 사냥개 베르티 포크츠를 크루이프의 전담 마크맨으로 붙였다. 포크츠는 악착같이 크루이프를 봉쇄했다. 그간 수없이 많은 전담 마크맨들을 농락하면서 활약해왔던 크루이프였지만, 포크츠는 여타의 마크맨들과는 달랐다. 결국 크루이프는 결승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1974년 월드컵에서 결승전 이전까지 단 1점만 실점할 정도로[21] 탄탄한 수비를 보였지만, 결승전에서는 지칠줄 모르는 체력으로 몰아붙이는 서독의 파상 공세에 연이어 뚫리며 위기를 맞았다. 결국 네덜란드는 파울 브라이트너와 게르트 뮐러에게 연속골을 내주면서 1:2로 역전패,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다만 결승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1974년 발롱도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해 프란츠 베켄바워는 국가대표로 월드컵 우승,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으로 분데스리가와 유러피언컵 우승을 했지만 크루이프의 혁명적인 플레이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여담으로 베켄바워는 크루이프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1974년 당시에는 리그, 챔스, 월드컵까지 모든 메이저 대회를 제패하고도 발롱도르를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22] 그 당시 크루이프가 월드컵에서는 역대급 퍼포먼스를 남겼지만 바르셀로나에서의 활약상은 다소 아쉬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참고로 이전 문서와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이때 골든볼을 크루이프가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피파 공홈과 RSSSF에는 이 당시 수상자 명단은 나오지도 않았다. 1978년 이후 수상자만 피파 공홈에서 인정받을 뿐이고 후대 평가 중 피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건 신인상 뿐이다. 다만, 크루이프는 당시 모든 언론사[23] 에서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혔으며 키커와 옵타에서 대회 평점에서 1위를 기록했다.# #
1974년 준우승 이후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은 이때부터 지금까지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독한 악연을 이어가고 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불참했는데, 독재자를 혐오한 크루이프의 성향상 '당시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에 반대해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가족 때문에 불참한 것이었다. 2008년 스페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괴한들에게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납치당해 생명이 위협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충격이 컸던 가족들을 내버려두면서까지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었다"라고 30년 만에 고백했다. 어쨌건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크루이프 없이도 결승까지 올랐지만 아르헨티나에게 패하고 만다.[24] 재미있게도 토탈 풋볼로 세계 축구계에 돌풍을 일으켰지만, 두 대회 연속 개최국에게 결승전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25]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크루이프는 피지컬, 테크닉, 브레인 삼박자를 모두 갖춘 완벽한 축구 선수였다. 빠른 순발력과 주력, 독보적인 레벨의 테크닉에 누구보다도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선수로, 온 더 볼과 오프 더 볼 상황에서 어떻게 공간을 확보하고 활용해야 할지 판단하는 능력이 당대 최고였다.
일단 그의 경기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주 넓은 시야다. 경기장 전체를 보는 듯한 넓은 시야를 통해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하는지를 잘 알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패스를 할 수 있었다. 토탈 풋볼의 선구자답게 종횡무진 빈공간을 찾아 움직이며 수비 라인까지 내려와 빌드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는 1974년 월드컵에서 무려 36회의 기회 창출을 기록했고, 이는 가히 월드컵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기회 창출 기록이다. 그나마 같은 월드컵에서 30회의 기회 창출을 기록한 카지미에슈 데이나, 28회를 기록한 1970년의 펠레, 27회의 기회 창출을 기록한 1986년의 디에고 마라도나, 30회를 기록한 2010년의 사비 에르난데스만이 이 기록에 근접해 있다.
또한 축구 역사상 최강급의 창조성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이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으며, 다른 선수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플레이를 자주 하곤 했다. 요즘도 간혹 보이는 페널티킥 상황에서의 패스도 크루이프가 최초다. 위의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정확하고 공격적인 아웃프런트 킥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또한 전술 이해도와 축구 지능마저도 축구사 끝판왕 수준이었는데, 그 토탈 풋볼을 단번에 이해하고 토탈 풋볼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천재가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당대 최고의 드리블러는 물론이요,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실력을 갖추었다. 영국 축구 전문 매체 '커트오프사이드'가 선정한 '축구 역사상 최고의 드리블러 베스트 10'에서 마라도나, 메시, 가린샤에 이은 4위를 차지하였는데, 앞선 세 선수들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드리블러로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축구에 필요한 대부분의 능력을 완벽히 갖추었으면서도 드리블마저 이들에게 필적할 만한 평가를 받은 크루이프의 위엄을 알 수 있다. 요즘 축구 선수라면 기본 소양으로 갖추고 있는 크루이프 턴을 실전에서 처음 제대로 활용했으며, 온갖 창조적인 드리블 스킬로 무장해 상대 수비수를 쩔쩔매게 만들었다.
거기에 체력과 수비 능력도 뛰어나, 팀 단위의 압박 수비를 본인이 직접 최전선에서 이끌었다. 공격수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슬라이딩 태클 실력을 자주 보여주었다. 무려 월드컵 결승전에서 그런 플레이들을 했으니 가히 혁명적인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천성적인 리더십까지 타고난 선수였다. 커리어 중간중간에 수비형 미드필더 및 리베로로도 종종 뛰었었는데, 앞서 말했듯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가 리베로로도 뛰었다는 것은 그만큼 수비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다.[26]
신체 능력 역시도 괴물 같은 수준으로, 당시 기준으로 꽤 큰 편인 180cm의 키에도 빠르고 민첩하면서도 피지컬도 준수한 수준이었다. 센터백들을 순간적인 치달로 벗겨낼 수 있었으며, 앞에 언급된 드리블 능력과 합쳐져서 순식간에 두세 명을 제쳐내고 슈팅을 때리는 것이 가능하던 선수였다.
또한 득점력도 상당한 선수였는데, 트랜스퍼마켓 기준으로 클럽 통산 502경기 262골과 135개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27] 국가대표팀에서 48경기 33골 2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앞에도 언급했다시피 전형적인 득점 기계 타입이 아니라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운 스타일임에도 2경기 1골 이상을 기록했으며,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은 오히려 클럽에서보다 훨씬 뛰어났다. 또한 19-20 시즌 레반도프스키 이전까지 역사상 유일한 득점왕 트레블 기록 보유자였기도 하다.
탁월한 운동능력과 역대 한 손에 꼽힐 만한 최고의 테크닉, 그리고 역대 최고 수준의 창조성과 경기 운영 능력으로 필드 전체에서 극도로 효율적인 플레이의 완성형을 만들어낸 선수가 바로 요한 크루이프이다.
3.1. 토탈 풋볼[편집]
헌데 사실 토탈 풋볼이라는 풍조를 요한 크루이프나 미헬스 감독 둘이서만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아약스 시절 이전에도 토탈 풋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흐름은 있었다. 1950년대 4년간 A매치 32연승이라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운 무적의 매직 마자르 헝가리는 경기 중에 유기적인 포지션 변경으로 황금색 바람을 일으켰고,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마슬로프는 압박과 4-4-2를 이용해 토탈 풋볼로 이어지는 여러 개념들을 앞서 선보였으며, 독일의 공격적인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워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도 카테나치오를 개량해서 스위퍼를 리베로 개념으로 운용하기 시작했고,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오늘날도 역대 최강 팀이라는 칭호를 듣는 유기적인 미드필더진을 구축한 바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토탈 풋볼을 완성시키고 축구계 전반으로 유행시킨 리누스 미헬스나 요한 크루이프의 위대함이 빛 바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두 사제지간이 만들어낸 위대한 업적들이 없었다면 토탈 풋볼은 오늘날 축구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두 사람과 당시 AFC 아약스,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부터 현대축구가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담으로, 이렇게 네덜란드에서 대를 이어 토탈 풋볼의 싹이 키워지고 있던 반면, 잉글랜드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킥 앤 러시 전술이 대세를 타게 된다.
4. 지도자 경력[편집]
4.1. AFC 아약스[편집]
1985년 아약스 감독으로 부임하여 3시즌 동안 KNVB컵을 2회 획득했으나, 리그 우승은 실패했다.[29] 그가 감독직에 있을 동안 리그 우승은 전무했음에도 당시 전술적으로 가장 공격적이고 화려한 팀 컬러를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4.2. FC 바르셀로나 - 드림팀의 수장[편집]
1988년에 주젭 유이스 누녜스 바르셀로나 회장은 크루이프를 감독에 앉혔다. 누녜스 회장의 리빌딩 의지를 등에 업은 크루이프는 기존 주전 선수를 거의 전부 방출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을 영입하여 사실상 새로운 팀으로 재창단했다. 크루이프는 부임하자마자 기존 선수들 중에서 게리 리네커를 제외한 주전 선수들을 전부 방출했다. 이 과정에서 크루이프를 대신해서 누녜스 회장이 악역을 자처하며 기존 선수단을 정리하면서 시시때때로 충돌하며 어려움을 겪었고, 이 때문에 지금도 좋지 않은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녜스 회장은 크루이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고, 크루이프가 원하는 선수들을 모두 영입해 주었다. 그리하여 크루이프는 부임 첫 시즌에만 13명의 선수를 영입했는데,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온 호세 마리 바케로와 혼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치키 베히리스타인 등 바스크 출신 선수들과 훌리오 살리나스, PSV 에인트호번에서 뛰던 로날드 쿠만, 유벤투스에서 온 미카엘 라우드루프, CSKA 소피아에서 빼어난 실력을 보인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등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기존 선수단 중에서는 팀의 에이스였던 리네커만 유일하게 남았으나, 크루이프는 리네커를 강제로 윙어로 포변시켰고, 이에 리네커의 불만이 높아져 1988-89 시즌이 끝나고 리네커 역시 이적시키고 만다.
이렇게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만을 모아 완전히 판을 새로 짜게 된 크루이프는 자신과 같은 고향 출신인 쿠만을 코치처럼 활용하면서 선수들에게 이미 아약스 시절에 구축한 티키타카와 토탈 풋볼을 바르셀로나에 이식했다. 당시 스페인 언론은 크루이프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게 된 이 팀을 '드림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선수들을 쓸어모아 드림팀을 이루었지만 첫 2~3시즌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그 사이 레알 마드리드는 라리가 5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하여 크루이프는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경질설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약 4년 간 라리가 4연패, 창단 이후 첫 유러피언컵 우승 등을 달성했다. 다만 1994년 이후 크루이프 감독과 선수들 간의 잇따른 불화가 불거지며 드림팀은 모래성처럼 와해되고 말았다.[30]
유소년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축구를 해야 한다는 지론을 설파하며 라 마시아 건립 및 유소년 교육에 신경을 쓴 크루이프는 캄 노우 경기장 옆에 위치한 미니에스타니를 찾아 B팀의 어린 선수들의 동태도 살폈다. 당시 바르사의 B팀은 카를레스 렉사흐 감독이 지휘 중이었는데, 크루이프는 당시 우측 미드필더로 뛰던 펩 과르디올라를 중앙 미드필더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한 뒤 1990년에 그를 1군 선수로 발탁해 팀의 심장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피보테(pivote)로 불리는 이 위치는 현대 축구에서 상대와 중원 대결에서 수비를 주로 펼쳐야 되는 포지션이기에 호리호리한 체형에 기술이 좋은 과르디올라를 선발한 것이 큰 논란이 되었다. 이에 크루이프는 이 위치에서 공을 가지고 공격을 펼쳐 라인 전체를 공격적으로 끌어올리는 이른바 현재의 바르사 팀 스타일, 그러니까 소유와 지배 그리고 전진 압박을 통한 지속적인 공격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이 '크루이프의 축구'에서 피보테는 가장 영리하고 볼 관리 능력이 가장 뛰어나야 하며 경기 흐름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대신 수비 면에서의 피드백은 그 뒤에 배치된 쿠만과 풀백 수비진이 커버했다. 전방으로 쏠린 대형에서는 수비적인 위험 부담을 수반하나 공격을 최선의 수비로 택한 크루이프의 축구는 부임 첫 시즌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을 시작으로 내용과 결과 면에서 일거양득을 이루어 세계 축구의 진보를 불러왔다.
하지만 이렇게 선수들을 쓸어모아 드림팀을 만들었지만 크루이프 감독의 바르셀로나는 처음에는 기대에 못 미쳤다. 특히 첫 엘 클라시코는 실망스러웠다. 1988년 10월 22일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2-3으로 졌다. 하지만 당시 바케로, 고이코에체아, 베히리스타인 등 새로 가세한 선수들이 많아 조직력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 패인이다. 이에 크루이프는 '충분히 비길 수 있는 경기였다. 1:2 상황에서 쫓아간 선수들에게 만족한다'라고 했다. 이어 1989년 4월 첫날의 안방 경기에서 무득점으로 비기면서 숙적 레알 마드리드는 라리가 4연패를 달성했다.
이후 드림팀은 절치부심하여 1989년 10월 7일에 처음으로 엘 클라시코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일등공신이 당해 영입한 쿠만과 라우드루프였는데, 이때 쿠만은 페널티킥으로 2골을 기록해 3-1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 2월 15일 마드리드 원정에선 살라나스가 두 골을 넣었지만 2-3으로 패하면서 크루이프는 경질 위기를 맞았다. 엘 클라시코에서의 패배도 뼈아팠고, 이해 레알 마드리드는 라리가 5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렇게 경질설에 시달리던 크루이프를 수렁에서 구해낸 것은 1990년 4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이었다. 역시 엘 클라시코로 펼쳐진 결승전에서 기예르모 아르모와 살라나스의 골로 2:0 완승을 거두며 코파 델 레이 트로피를 차지했다. 이에 누녜스 회장이 크루이프를 지지하여 그를 유임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은 감정이 격앙된 경기였다. 그 증거로 경기 당시 퇴장된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수인 페르난도 이에로는 '내게 이 결승전에서 가장 기분 나쁜 부분은 우승컵을 스페인 사람들이 따내지 못한 것'이라고 민족 정서를 자극해댔다.
엘 클라시코의 균형이 완전히 바르셀로나 쪽으로 넘어온 것은 1994년 1월 7일 캄 노우에서 호마리우가 해트트릭을 몰아치며 5:0 대승을 거둔 경기부터다. 이는 크루이프가 선수 시절에 5:0 대승을 이끈 지 정확히 20시즌만에 감독으로써 또 한번 5:0의 역사를 만들어 그해 코파 델 레이 준결승에서 당한 완패를 설욕해낸 것이다. 게다가 1995년 5월 마드리드 원정에서도 1:0으로 승리하며 바르사는 라리가 4연패를 자축했다. 그의 마지막 엘 클라시코는 1996년 2월 10일 캄 노우에서 열린 경기였다. 이때 바르사는 코드로의 두 골과 루이스 피구의 골로 3:0 완승을 거두었다. 그 전인 1995년 9월 30일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는 라울 곤살레스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로헤르의 동점골로 비겼다.
그러나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는 1993-94 시즌 이후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팀의 분위기가 무너진 것이 컸는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이는 크루이프의 독선적인 성격과 스타 선수들의 제멋대로인 성격 양쪽이 안좋은 시너지를 낸 것이 컸다. 원래 이전부터 라우드루프, 스토이치코프 등 자존심 높은 스타플레이어들과 고압적인 태도의 크루이프 감독은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1993년 방탕한 사생활과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한 호마리우까지 합류하면서 팀의 케미는 더욱 빠르게 무너지게 된다.
특히 호마리우를 영입하고 나서 당시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선수였던 라우드루프를 대놓고 천대하면서 심각한 갈등이 생겼다. 라우드루프는 191-92 시즌 라리가 외국인 MVP로 꼽힐 만큼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베켄바워가 60년대는 펠레, 70년대는 크루이프, 80년대는 마라도나, 90년대는 라우드루프의 시대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라우드루프의 활약은 대단했다. 게다가 라우드루프는 바르셀로나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여 팀을 이끄는 리더 역할도 하고 있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라우드루프는 크루이프와 더불어 바르셀로나의 올타임 레전드로 꼽히는 것은 물론이고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에서 선수로서는 이루지 못한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차지했고[34] 당시 드림팀 멤버라면 조만간 다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라우드루프와 쿠만이 크루이프를 능가하는 바르셀로나 역대 최고의 레전드에 꼽힐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 중 쿠만은 지금도 바르셀로나에서 역대급 레전드 중 하나로 대우받고 있다. 그러나 당시 팀에서 쿠만을 능가하는 1옵션 에이스이자 심지어 크루이프의 위상조차 넘을지도 모른다고 점쳐지던 라우드루프는 아래에 서술된 것처럼 크루이프에게 내쳐지고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고 만다.
크루이프는 1993년 여름 새로 영입한 호마리우를 중용하면서 라우드루프를 교체 명단에서조차 제외하기도 하는 등 대놓고 천대했다. 물론 호마리우가 좋은 활약을 펼치긴 했지만 크루이프가 대놓고 라우드루프를 무시하던 방식은 당시에도 팬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과 반감을 가져왔다. 게다가 호마리우는 사생활과 팀워크에서 상당한 문제를 야기했다. 호마리우가 클럽 밖에서 문란한 사생활로 야기한 성추문 등 구설수는 둘째치고, 클럽 안에서도 연습 시간 때마다 크루이프의 지시를 듣지 않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불성실하게 훈련에 임했다. 크루이프는 선수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잔소리가 심한 스타일이었고 이미 라우드루프라는 게으른 천재로 인해 골치를 자주 썩이고 있었으나, 그 라우드루프를 한층 능가하는 문제아 호마리우에게는 정작 별말도 못하고 그가 라커룸 안팎에서 망나니짓을 하는 것을 거의 방임했다.
물론 크루이프가 호마리우에게 전혀 잔소리를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마리우는 그때마다 능글맞게 응수하거나 심지어 크루이프 감독에게 '당신이나 감독질 제대로 해라, 나는 매 경기 골을 넣는다'며 큰소리쳤다. 똑같이 속썩이던 라우드루프는 그래도 예이~예이~ 하며 적당히 흘리는 식이었는데 호마리우는 그냥 대놓고 개기는 스타일이었고 이런 호마리우를 크루이프는 거의 전혀 컨트롤하지 못했다.[35] 호마리우는 바르셀로나 팀원들과도 전혀 융화되지 않았다. 그나마 스토이치코프를 제외하면 다른 동료들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스토이치코프도 성질이 대단한 인간이라 둘이서 누가 팀의 1인자인가를 두고 제법 충돌했다. 때문에 바로셀로나의 팀 분위기는 개판 일보직전까지 갔다. 호마리우는 그해 경기당 1골에 가까운 놀라운 활약을 펼쳤지만 바로셀로나 팀 자체는 이전에 보였던 응집력 있는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크루이프의 라우드루프 홀대는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때 라우드루프가 선발은 커녕 벤치에도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 앉으면서 정점을 찍었다.[36] 당연히 이는 현지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라우드루프가 선발에서 제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장 카펠로 감독은 라우드루프가 없으니 우리가 우승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대놓고 바로셀로나를 흔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셀로나 팀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고 결국 객관적 전력에서 한 수 아래라 평가받던 AC 밀란에 0-4라는 굴욕적인 참패를 당했다. 지금까지도 역대 챔피언스리그 최다 점수차 경기 타이 기록의 불명예로 남아있는 치욕적인 경기였다. 이 충격적인 참패 직후 라우드루프는 비시즌 기간 결국 크루이프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충격을 주었다. 라우드루프의 충격적인 레알 이적 때문에 많이 가렸지만 바르셀로나에서 드림팀의 핵심 멤버 중 한명으로 팀에서 나름 레전드급 커리어를 쌓았던 안도니 수비사레타를 1993-94 시즌이 끝나고 모양새 좋지 않게 퇴출시킨 것도 바르셀로나 팬들을 실망시켰다. 이렇게 몇몇 핵심 선수들이 팀을 떠나고 남아있는 선수들도 전혀 뭉치지 못하며 드림팀은 와해되었다.
물론 크루이프가 팀의 새로운 핵심이라 생각했던 선수들은 대부분 남아 있었지만 상술했뜻 문제는 팀의 분위기가 개판이었다는 것이다.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크루이프가 저런 난리를 겪으면서도 보호해주었던 호마리우는 라우드루프 이적 후 귀신같이 부진에 빠졌다. 비시즌 기간 호마리우는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고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지만 복귀 후 심각한 부진에 빠졌다. 게다가 호마리우는 원래부터 말을 안 들어먹었는데 이제는 아예 대놓고 팀 훈련에 무단 불참하는 등[37] 문제 행동은 더욱 심각해졌다. 1993-94 시즌에 무려 라리가 30골을 넣었던 호마리우는 다음 시즌 겨우 4골을 넣었다. 경기 중에 디에고 시메오네를 가격하며 징계를 받기도 했다. 결국 인내심에 한계에 달한 크루이프는 마침내 호마리우를 갈궈대기 시작했고 심지어 언론에 대고 공개적으로 호마리우를 비난했다. 물론 호마리우도 '네 앞으로 훈련 열심히 할게요' 할 성격이 아니었고 단단히 삐져서 그냥 고향 브라질로 돌아가겠다고 선언, 결국 1995년 1월 바르셀로나와 계약을 해지하고 브라질로 돌아가고 만다.
팀이 침체에 빠지며 저조한 경기력을 펼치자 바르셀로나 팬들은 선수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런 팬들의 반응은 선수들을 더욱 힘빠지게 했다. 게다가 호마리우와 마찬가지로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왔던 스토이치코프와의 갈등도 1994-95 시즌에 최악으로 치달았다. 스토이치코프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기면 크루이프 감독 덕분이고, 패하면 선수들 탓이다"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면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스토이치코프는 결국 1994-95 시즌 단 6골만 기록하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결국 1994-95 시즌 바르셀로나는 수차례 졸전을 펼친 끝에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이 끝나고 쿠만, 스토이치코프 등 그나마 남아있던 팀내 핵심 멤버들도 대거 팀을 떠나 이적하면서 이렇게 드림팀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렇게 크루이프는 감독 시절 말년에 팀의 주축인 스타 플레이어들과 모조리 마찰을 일으켰다. 쿠만 정도만 그나마 크루이프와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은 케이스. 오히려 쿠만의 경우 크루이프의 편애로 팀내에서 약간 불편한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다. 크루이프는 자신과 같은 고향 출신인 쿠만을 편애하는 정도를 넘어서 바르셀로나에서 항상 네덜란드식 축구를 운운하며 쿠만을 네덜란드식 축구를 바르셀로나에 이식하는 시범조교로 삼았다. 다만 쿠만과 잘 지낸것은 쿠만이 문제아들과 달리 성실하고 비교적 온순한 성격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드림팀이 해체된 것은 크루이프의 성격 문제도 크지만 당시 핵심 스타선수들의 성격 자체가 그 어떤 감독이 와도 다루기 어려운 괴짜들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훗날 펩르사 시대의 핵심인 세얼간이와 메시는 워낙 온순한 성격이라 커리어 내내 감독과 큰 불화나 마찰이 없었다는 점과 대조되는 면이다.[38] 아무튼 크루이프는 과르디올라 같은 신예가 1군으로 올라오면 크루이프는 항상 쿠만을 불러 네덜란드식 축구를 가르쳐라고 지시했다. 참고로 현재 바르셀로나식 축구라 부르게 된 이 스타일을 크루이프는 결코 바로셀로나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크루이프는 항상 자신이 추구하는 축구를 네덜란드식 축구라 불렀다.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크루이프와 바르셀로나가 추구하던 축구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지도로 크루이프 자신과 그리고 아약스, 그리고 네덜란드 대표팀에 의해 구현된 축구였기 때문이다.
1994년 이후 크루이프는 경질될 때까지 2년간 무관에 머물렀다. 이에 따라 크루이프 감독과 누녜스 회장 간의 감정의 골은 점차 깊어졌고, 결국 크루이프는 1995/96 시즌 말미에 감독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크루이프는 장장 8년이라는 바르사 역사상 최장기 집권 동안에 무려 11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선수 시절보다 더 큰 결실을 맺었다. 그 중에서도 바르셀로나의 오랜 숙원이었던 유러피언컵 첫 우승은 크루이프에 의해 달성하게 된다. 이런 성과들을 통해 그는 역대 최고의 선수에 이어 역대 최고 감독의 반열에도 든 것이다. 그는 선수단 내부에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상대 팀과의 관계에서 늘 극단적인 지지층과 적대적인 대상을 만들어서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가 최고의 실력자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만만했고, 선수들보다 더 화려하게 언론을 장식했다. 몇몇 선수들과 좋지 않은 이별도 있었고, 위에서 언급한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0:4로 대패하긴 했지만, 그가 심어놓은 철학과 스타일이 현재까지도 계속 발전하고 계승되어 현재의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축구를 집대성했다.
4.3. 말년[편집]
1995-96 시즌을 끝으로 바르셀로나에서 경질된 후 더 이상 감독 경력을 이어가지 못했다. 특히 1993-94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미카엘 라우드루프를 관중석에 앉도록 한 조치는 당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래놓고서 경기도 0:4라는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역사상 최다 점수차 패배라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선수들과 갈등이 심하고 고집이 센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단단히 박혀버렸다. 게다가 갈등을 빚던 라우드루프와 스토이치코프 등이 줄줄이 팀을 떠나자 바르셀로나는 추락했고, 결국 크루이프도 선수 빨이고 그 선수들도 잘 챙기지 못해서 팀이 와해된다는 인식을 가져왔던 것. 결국 바르셀로나에서 물러난 후 다른 클럽의 감독이 되지 못했다.
이후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갔다. 은퇴한지 10여년 만에 2009년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하여 3년간 재직했다. 그러나 카탈루냐 대표팀은 일년에 한번 정도 경기를 치르는데다가 그것도 라리가 휴식기 동안 벌어지는 이벤트성 비공식 경기였기에 별 비중은 없었다.
5. 사망[편집]
2015년, 크루이프는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가 2016년 3월 24일 향년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기사. 크루이프는 선수 시절부터 담배를 피워왔는데 이후 지도자 시절까지 담배를 끊지 못했다. 워낙에 골초로 유명했던지라 건강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었는데, 결국 우려는 폐암 발병으로 현실이 되어버렸다.
4월 3일 펼쳐진 엘 클라시코에서는 경기장 중앙에 'Gràcies Johan'(해석하면 '고마웠어요 요한')이라는 글귀가 놓여 있었고, 그의 등번호인 14번에 맞춰 전반 14분에는 모든 관중이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2:1 승.
2018년 4월 5일, 아약스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2018-19 시즌부터 아약스의 홈구장의 이름이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로 명칭이 바뀔 예정이고, 크루이프 아레나의 새로운 로고가 발표될 것이다" 라고 발표했다.
친분이 있던 펠레는 트위터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마라도나 역시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6. 기록[편집]
6.1. 선수[편집]
6.1.1. 대회 기록[편집]
- AFC 아약스 (1964~1973, 1981~1983)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83~1984)
6.1.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1971, 1973, 1974
- 발롱도르 드림팀 2군[40] : 2020
- FIFA 월드컵 올타임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71-72
- IOC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 1970-71, 1972-73
- 네덜란드 올해의 운동 선수: 1973, 1974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1968, 1972, 1984
- 에레디비시 득점왕: 1966-67, 1971-72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41] : 1976-77, 1977-78
- KNVB 베이커 득점왕: 1966-67, 1967-68, 1969-70, 1970-71, 1971-72
- NASL MVP: 1979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유럽팀: 1998
- 옹즈 드 옹즈: 1977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72, 1977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프랑스 픗볼 60년간 베스트 XI: 2007
- UEFA 주빌리 어워드: 2003
- UEFA 회장상: 2013
- FIFA 100: 2004
- FIFA 공로장: 2010
- KNVB 평생 공로상: 2006
- FICTS 명예의 전당: 2010
- 라우레우스 평생 공로상: 2006
- 라우레우스 스포츠 투혼상: 2016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유럽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네덜란드 드림팀: 2022
- 아스 올타임 XI: 2021[42]
6.2. 감독[편집]
6.2.1. 대회 기록[편집]
- AFC 아약스 (1985~1988)
- KNVB 베이커: 1985-86, 1986-87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86-87
- FC 바르셀로나 (1988~1996)
- 라리가: 1990-91, 1991-92, 1992-93, 1993-94
- 코파 델 레이: 1989-90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1, 1992, 1994
- 유러피언컵: 1991-92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88-89
- 유러피언 슈퍼컵: 1992
6.2.2. 개인 수상[편집]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1987
- 라리가 최우수 감독[43] : 1990-91, 1991-92
- 옹즈도르 올해의 감독: 1991, 1992
-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1991-92
- 엘 파이스 올해의 감독: 1992, 1993, 1994
- UEFA 역대 최고의 감독 10인: 2016
6.3. 수훈[편집]
- 오라녜나사우 훈장 기사장: 1974
- 오라녜나사우 훈장 장교장: 2002
- 왕립 스포츠 공로장 금메달[44] : 2016
7. 어록[편집]
"축구는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것이다."
"공을 가지면 내가 주역이다. 결정하는 것도, 창조하는 것도 나다."
"나는 공을 처음 잡은 순간부터 내가 천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내 팀에서는 골키퍼가 첫 번째 공격수고, 포워드가 첫 번째 수비수다.''
''축구는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하게 플레이하는 것은 어렵다.''
"결과 없는 내용은 무의미하다. 내용 없는 결과는 지루하다."[45]
''찬스라는 것은 논리적(logical)이다.''[46]
''심각하게 멍청하거나 수면부족이 아닌 이상 내 팀에서 포워드는 15m 이상 달릴 필요가 없다.''[47]
''모든 불리함은, 각각의 유리함을 가지고 있다.''
''스로인은 언제나 내가 도맡아했다. 왜냐하면, 스로인 한 공이 내게 되돌아오는 순간 나는 경기장에서 유일하게 노마크인 선수가 되는 거였으니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스페인에서는 경기에 나가기 전 22명의 선수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성호를 긋는다. 만약 효과가 있는 거라면 모든 경기의 결과는 무승부가 될 테지.''
''잉글랜드 축구는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가장 재미있는 축구다. 선수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압박이란 건 뛰어난 테크닉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바티스투타는 패스부터 다시 배워라''
''내가 만약 아르헨티나 감독이라면 절대로 바티스투타를 쓰지 않을거다''
''바티스투타 너다. 네가 실패의 원인이다.''
왜 이렇게 바티스투타를 미워하는거야
''11명보다 오히려 10명일 때가 팀은 잘 돌아가기 마련이다. 농땡이 피우는 놈이 없어지니까.''
''도대체 누가 나한테 축구를 가르칠 수 있지?''
''축구는 기술력, 전술능력, 체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보다 기술이 좋은 선수도 있고 나보다 신체능력이 좋은 선수도 있다. 하지만 중심 요소는 전술능력이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전술능력을 간과한다. 전술능력은 시야, 신뢰, 대담성으로 나눌 수 있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나는 대부분의 다른 선수들보다 뛰어나다.''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드사이 같이 형편 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48]
8. 크루이프에 대한 헌사[편집]
''유럽의 왕''
라디오 타임스 #
프랑스 풋볼, 1971년 유럽 최고의 선수 1위 선정 코멘트[49]
요한 크루이프는 월드클래스 플레이어 그 이상이다.
축구 역사상 3대 영웅은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입니다.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지는 못했지만, 그는 네덜란드와 세계 축구를 변화시킨 매우 특별한 선수였습니다.
당신이 크루이프를 경기장 밖에서 보면 그는 마치 마른 소년 같을 것이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그는 다른 행성에서 왔다.
크루이프 너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자질이 있어. 그러니 담배를 끊고 나를 따라라. 제대로 훈련을 해! 내가 널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주마! 당대 최고가 아니라 그 이상, 펠레를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고!
크루이프가 없다면 내겐 팀이 없는 것이다.
요한 크루이프, 마라도나, 펠레, 에우제비우 모두 환상적인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요한이 역사상 최고였다.
요한은 완전한 1인자였다. 마치 현재의 메시와 같이 매우 특출한 선수였다. 나는 한밤중에도 메시를 보기 위해 일어난다. 심지어 그가 경기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50]
사람들은 마라도나, 펠레, 베켄바워와 같이 여러 대단한 선수들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크루이프가 최고였다. 그는 세계 최고였다.[51]
하인츠 스투이[52]
선수로서 그는 축구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크루이프는 바르사에 와서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오늘날의 바르사는 그와 함께 시작했다. 그는 우리의 정체성의 표현이다. 그는 우리가 사랑하는 스타일의 축구를 탄생시켰다.
크루이프가 나보다 나은 선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월드컵을 제패했다.
1960년대 최고의 선수는 펠레였고, 1970년대는 크루이프, 1980년대는 마라도나였다. 그리고 1990년대의 최고는 미카엘 라우드럽이다.
크루이프는 유럽이 낳은 최고의 축구선수였다.
크루이프는 축구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가 역대 최고의 유럽 선수였냐고? 미드필드에서 그는 최고였다. 수비로서도 최고였다. 공격수로서도 최고였다. 그는 최고였다.
내 생각에 그는 펠레, 마라도나와 함께 항상 이름이 오르내릴 그런 전설 중의 한 사람인 것 같다. 나머지 우리들은 그저 인간일 뿐이고, 그냥 왔다가 가는 것일뿐이다.
그는 처음에는 선수로서, 그리고 다음에는 감독으로서 세계 어느 누구보다도 축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만났던 모든 감독들이 중요했지만 그 중에서도 크루이프가 가장 중요했다. 그의 훈련과 전술은 똑같지 않았고, 경기의 승패가 갈리는 200만가지 디테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요한 크루이프는 그림을 그렸다. 이후의 바르셀로나 감독들은 단지 그 그림을 회복시키거나 향상시켜왔을 뿐이다.
요한 크루이프는 내가 본 선수들을 통틀어 최고로 손꼽힌다. 월드컵 우승이 최고의 선수를 선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프랑크 르뵈프도 최고의 선수 명단에 그 이름을 올려야 한다.
로비 제임스
내가 존경하는 요한 크루이프 선수를 처음으로 본 것은 98년이다. 그의 월드컵 경기 장면을 분석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정말로 축구를 잘하는 선수였다. 단지 공을 잘 차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팀의 리더로서 든든한 리더십을 갖췄고 골을 넣을 때나 어시스트를 할 때, 그리고 팀의 분위기를 반전시기키는 능력까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는 정말로 내가 생각하기에 토탈 사커라는 이름에 걸맞는 완벽한 선수'였던 것이다. 나는 골만 잘 넣는 선수도 싫고, 어시스트만 잘하는 선수도 싫다. 아직 실력은 부족하지만 나 스스로도 모든 면에서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 크루이프 선수는 모든 면에서 다재다능했다. 아마 그가 브라질의 축구 영웅 펠레가 활약할 당시에 선수 생활을 했다면 펠레를 능가하는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사실 펠레는 골을 많이 넣기는 하지만 기동력 면에서는 그리 뛰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요한 크루이프의 경우 빠른 스피드를 갖췄다는 점에서 현대 축구에 가장 걸맞는 선수일 것이다.
70년대 네덜란드 팀의 중심에는 요한 크루이프가 위치했다. 크루이프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모든 동료들의 움직임을 스스로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많은 사람들이 크루이프를 '그라운드의 감독'으로 표현하기까지 한다. 한 유명 저널리스트가 남긴 말은 크루이프가 얼마나 영리하고, 축구에 정통한 인물이었는지를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펠레는 볼을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다뤘고, 마라도나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여러명의 수비수들을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통해 제압했다. 그런 면에서 펠레는 축구공을, 마라도나는 수비수들을 지배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어쩌면 축구 그 자체를 지배했던 인물일런지도 모른다.
이형석
축구를 정말 잘했습니다. 볼 컨트롤, 패스, 시야 등 괜히 축구의 신으로 불리는 게 아니구나 싶었죠.
저도 그 사건으로 인해 네덜란드 전역에 유명세를 탔습니다. 당시 크루이프는 축구의 神(신)으로 불렸지요. 네덜란드가 개발한 토털 사커의 지휘자였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영웅이었고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지금 '크루이프 턴'으로 불리는 턴 동작이 기가 막혔다. 굉장히 스피드가 빠른데다 방향전환도 좋아 따라잡기가 힘든 선수였다. 개성이 뚜렷하고 우수한 기량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주는 리더십으로 감독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내가 현역시절에 당대 최고의 선수들로 꼽혔던 프란츠 베켄바워, 디에고 마라도나와도 경기를 해봤는데 경기장에서 흐름을 잡고 동료들을 이끄는 능력은 크루이프가 그 누구보다 최고였다.
요한 크루이프는 제가 생각하는 역대 최고의 선수입니다. 단연코 No.1입죠. 펠레, 마라도나보다 낫냐?고 물으실 수 있는데, 펠레와 마라도나는 축구 선수로 보면 안되지요. 저는 역대 최고의 선수를 논할 때 펠레와 마라도나는 뺍니다. 두 사람은 존경 혹은 경외의 대상이지 비교의 대상이 아녜요.
김유석[54]
펠레, 크루이프, 마라도나는 의심의 여지없는 천재다.
엘 문도 데포르티보
그는 비전, 태도, 존재감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매우 융통성이 있어서 상대가 그를 걷어차려고 할 때 그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때맞춰 움직였다. 수비수들은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메인 스트라이커의 제공자였지만 그 자신도 다산적인 골잡이였다.
아약스 전력의 50%를 크루이프가 차지한다. 만약 우리 팀에 크루이프가 있었다면 우리가 유러피언컵을 우승했을 것이다.
그는 천재였다. 그는 6번째 혹은 7번째 감각을 가졌다. 경기에서 그는 왼발과 오른발 그리고 슈팅으로 가장 예상치 못했거나 최고의 해결책만 선택했다. 그는 단지 경기만 뛴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수비에도 힘썼다. 나에게 그는 60년대와 70년대 최고의 선수이다. 펠레가 아니다. 펠레는 전형적인 골잡이였다. 공을 가지면 득점을 해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의 심장이자 브레인이었다.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는 우주 나머지 위에 존재한다.
Laurent Vergne[56]
크루이프는 스포츠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를 만난건 행운이었다.
1위 펠레, 2위 마라도나, 3위 크루이프, 4위 메시, 그리고 그와 동급인 디 스테파노.
알피오 바실레, 최고의 선수들 뽑으라는 질문에
만약 당시 발롱도르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시상했다면 나는 메시, 호날두보다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선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요한 크루이프, 메시다. 호날두는 아니다.
나에게 크루이프는 축구의 역사를 바꾼 사람이다. 그는 축구의 신이다.
마라도나, 메시, 펠레, 요한 크루이프, 지단, 디 스테파노는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다. 그들은 차이를 보여준 선수들이다.
역대 TOP 5는 펠레, 마라도나, 메시,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다.
우리는 그와 같은 선수를 한번도 본 적 없다. 그는 빠르고 기술적이며 팀의 리더였다. 거의 그가 팀의 감독인 것 같았다.[57]
단테 미르콜리[58]
크루이프는 남다른 경지에 있었다. 인상적인 퀄리티를 지닌 위대한 축구선수였다. 그는 아주 기술적이었고 경기를 이해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이기적이기도 했지만 그는 패스를 할줄 알았고 그렇게 했다. 그는 수비하기가 힘든 선수였다. 특히 속도변환때문에 말이다. 크루이프를 1대1 상황에서 막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왼쪽 윙으로 가기도 하고 오른쪽 윙으로 가기도 했다. 그는 멈추었다가 드리블하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속력을 변화시킬 줄 알았다. 그는 그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였다.
크루이프가 박스 안에서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수비수가 있다는 것을 찾아내면, 그는 필드 중앙으로 이동한다. 수비는 그를 당연히 필드 중앙까지 따라가서 마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그는 그의 스피드를 이용한다. 월드컵 결승에서 네덜란드에게 주어진 페널티킥이 크루이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이다. 훌륭한 마크맨인 포그츠가 단단히 마크를 하기에 그는 필드 중앙으로 갔다. 그는 볼을 받고 공격을 만들어 나갔으며 그를 쓰러뜨리려는 모든 수비들을 드리블로 제쳐냈다.
만약 다음 해까지 기다린다면, 그는 40억 리라의 가치가 있다.[60]
크루이프는 작은 소년마저도 게임에 관심을 갖게 할 정도로 전술적으로 완벽했다. 그것이 그가 어렸을 때부터 전술에 매우 큰 흥미를 가졌던 이유이다. 그는 항상 경기의 상황들을 매우 명확히 봐서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될지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요한은 항상 내 우상이었다. 나는 1970년대에 뤼트 크롤, 요한 네스켄스, 스야크 스바르트 그리고 크루이프와 같은 선수들이 함께 했던 1970년대의 위대한 팀인 아약스의 경기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3연속으로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고,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그 팀은 분명히 매우 좋은 팀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크루이프는 항상 내 관심을 끌었다. 요한은 아름답고 우아한 선수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아마 내가 15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고 나는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와 악수하고 싶었고 내 이름을 기억해달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그를 매우 존경했던 것 같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가 축구계와 네덜란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깨달았다.
사람들은 나와 요한을 비교해서는 안된다. 요한은 확실히 다른 레벨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본보기로 삼았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나는 그와 신체조건도 다르고 시대도 달랐다. 나는 그가 가진 신으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스피드와 폭발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도 결국에는 나도 훌륭한 선수가 되었다. 지능적이고 수비수를 제쳐낼 줄 알며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넘버 10이었다. 그는 경기장 전체를 지배했다.[61]
내게 있어서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이다. 나는 어렸을 때 크루이프처럼 되고 싶었다. 그는 나의 친구였다. 그가 그립다.
난 1970년대의 네덜란드를 좋아한다. 그들은 날 흥분시켰고 크루이프는 최고였다. 그런 크루이프는 내 어릴적 영웅이었다. 내 침실 벽에 그의 포스터를 붙여 놓기도 했다. 그는 위대한 창시자로 축구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아약스는 크루이프를 필두로 축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가 원한다면 그는 피치 위의 어떤 포지션에서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내게 묻곤 했다. "브라질리언이었으면 했던 선수가 있었는가?" 질문에 답을 한다면, "아무도 없었다. 몇몇 굉장한 선수들이 있고 그들을 보며 감탄도 했지만 브라질리언이길 바랬던 적은 없었다. 그러다 크루이프를 보았다. 나는 그가 브라질리언이길 바랬다. 그를 보는 것은 즐거웠다."
우리는 크루이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절대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가 브라질에 2-0으로 승리하자 브라질 언론들의 반응[62]
[63]
그는 신체능력과 파워의 측면에서 마치 호날두와 같았다. 재능, 창조성, 예술성에 있어서는 마치 메시와 같았다. 크루이프는 경기장에서 두 사람의 능력을 하나로 결합해 내었다.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미겔 레이나[64]
그가 선수로서 바르사에 있었던 시간은 스페인 축구와 바르셀로나를 바꿔놓았다. 그는 단독으로 스페인에 새로운 스타일의 축구를 도입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 세계에 사비와 이니에스타같은 선수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오리올 도메니크[65]
크루이프는 스페인에서 축구의 개념을 재창조했다. 오늘날의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은 그가 바르사를 지휘했었다는 궁극적인 증거이다.
진정한 축구 브레인이다. 그는 최고의 컨트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창조적이었고 공과 함께 본능적으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골을 넣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 기술적인 선수였지만,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그와 함께 하는 선수들의 강력함과 함께 플레이했다.
크루이프는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그는 아직도 축구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네덜란드 축구의 대부이다.
나는 스웨덴 리그에서 18년, 스웨덴을 위해 17번 뛰었지만 크루이프와의 경기는 내 생애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공을 확실히 빼앗을 줄 알았는데 그가 나를 속였다. 나는 굴욕적이지 않았다. 나는 기회조차 없었다. 크루이프는 천재였어.
얀 올슨[66]
그는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바르셀로나의 토대를 쌓았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의 지배를 멈추게 한 바르셀로나의 중대한 전환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합류하기 전 그리고 전환이 진행되기 전 2년간, 크루이프는 거대한 정리를 진행했다. 그것은 혁명과도 같았다.
요한 크루이프는 축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가 캄 노우에 자신의 철학을 세우지 않았다면, 리오넬 메시는 바르사에 오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한 13세의 소년인 채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니에스타 역시 선택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레이엄 헌터[67]
크루이프는 그가 항상 옳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는 정말로 항상 옳았다는 것이다.
조니 보스만[68]
나에게 그는 역대 최고이다.
세계 축구는 최고의 선수를, 나는 어린 시절의 우상을 잃었다.
크루이프가 평안히 잠들었다. 그의 유산은 영원할 것이다.
축구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 크루이프에게 경의를 표한다.
크루이프는 축구를 새롭게 만든 남자이다.
크루이프는 대단한 선수이며 감독이었고 선생이며 사람이었다.
나는 1963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 경력의 후반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들을 상대했고 그 후에도 펠레, 에우제비우, 조지 베스트, 바비 찰튼과 같은 멋진 선수들과 계속해서 경기를 할 만큼 운이 좋았다. 하지만 요한 크루이프는 순수한 능력 면에서 내가 만난 최고의 선수였다. 그는 축구 측면에서 확실히 진정한 슈퍼스타였고 그와 같은 경기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그 당시 그는 최고는 아니더라도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 되고 있었다. 아약스는 당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과 마찬가지로 멋진 팀이었다. 크루이프는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돈을 지불하고 가서 볼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를 막으려는 것보다 아이브록스 테라스에서 그를 지켜보는 게 나았을지도.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나는 그에게 푹 빠져있었고 그와 함께 뛸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다. 크루이프와 함께 플레이하는 것은 마치 잘 보낸 인생과 같다. 크루이프가 돌아왔을 때 경기장은 만원이었고 모두가 그를 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우리는 더이상 경기에서 지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PSV에 꽤 뒤졌지만 JC가 온 뒤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 마지막에 우승을 차지했다.
나에게 있어 크루이프는 소설가 쥘 베른 같은 사람이다. 그는 시대를 앞서 간 감독이자 리더였다.
그는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내가 축구 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었을 때 그는 신화이자 따라야 할 아이콘이었다. 그 후 내가 축구 감독이 되었을 때 크루이프는 나의 레퍼런스 중 하나였다. 그는 현대 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를 만든 유명한 '오렌지 시계태엽'의 주요 요소 중 하나였다.
크루이프는 놀라운 선수였다. 크루이프와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클럽과 팀이 모두 바뀌었다. 그는 모든 수준에서 관습을 거부했다.
요한 크루이프는 모든 것이다. 크루이프처럼 현대 축구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축구 종교의 수호자가 되었으며,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그리고 영원히 클럽에 혁명을 일으킨 신이 되었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네덜란드인이다. 세계는 크루이프를 통해 네덜란드를 알게 되었다.
9. 평가[편집]
9.1. 선수로서의 평가[편집]
요새는 토탈 풋볼로 인한 혁명가 이미지 때문에 선수로써 크루이프를 과소평가하는 억측이 나오고 있지만, 선수 시절 기량만으로도 마라도나의 등장 이전까지 펠레, 디 스테파노에 가장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았던게 크루이프다.
그는 1970년대 당시 발롱도르 3회 수상, 유러피언컵 3연패 등 뛰어난 커리어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서 당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크루이프가 활약했던 1970년대에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인 프란츠 베켄바워,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잡이인 게르트 뮐러 등 걸출한 선수들이 대거 활약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베켄바워와 뮐러를 각각 2인자와 3인자로 밀어내고 시대의 1인자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크루이프의 실력을 체감할 수 있다. 애초에 커리어부터가 리그 우승 10회, 챔스 3연패, 트레블, 득점왕 트레블, 발롱도르 3회 등 대단한 수준인데, 그 중 리그 우승 10회, 발롱도르 3회 수상이나 챔스 3연패 등은 현재 시점에서 보아도 경이적인 수준이며 그 팀을 이끈 크루이프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를 증명하는 셈이다.
현재도 매우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다. 2017년 이후 각국 축구 전문지에서 매긴 순위 합산을 보면 펠레, 마라도나와 메시에 이은 4위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으며, 2017년 포포투와 부트발에서 뽑은 역대 TOP 100에서는 각각 4위와 3위를 차지하였다.[74] 2018년 포포투 필진이 뽑은 역대 TOP 5에서는 펠레와 함께 가장 많은 1위 표를 획득하였으며 종합적으로는 메시, 마라도나를 누르고 펠레에 이은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과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20세기 유럽 최고의 축구 선수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0, 1981년도 기자단 역대 베스트 11에서 크루이프는 디 스테파노에게 밀렸으며,[75] 1989년 슈퍼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디 스테파노가 크루이프와 베켄바워, 미셸 플라티니를 모두 제치고 수상하였다. 그러다가 20세기 말에 들어서는 세계 각지 언론사가 발표한 랭킹에서 크루이프가 디 스테파노에 조금씩 앞서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더 흐른 지금은 월드컵에서의 불운과 자료 부족, 디 스테파노의 명성이 대단했던 시기에 활동했던 전문가들의 사망, 은퇴 등으로 디 스테파노에 대한 평가가 더욱 떨어졌다. 그래서 그에 비해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으며 '현대 축구의 상징'이라는 확실한 의미도 부여할 수 있는 크루이프 쪽이 대체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는 국대 무관이라는 오명을 듣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국가대표를 조기 은퇴하여 단 두 차례의 국제 대회 출전 경력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76] 클럽과 국가대표로서 모두 역대 최고 수준의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특히 1974년 월드컵에서는 무려 36회의 기회 창출을 기록했고, 이는 가히 독보적인 단일 월드컵 역대 최다 기회창출 기록이며,[77] 다른 후보들은 월드컵, 리그, 유러피언컵(챔스)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전대미문의 업적을 이루어낸 베켄바워 대신 크루이프가 발롱도르를 차지했고 현재까지도 국대 무관이라는 비판은 전혀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점에서 그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다. 에우제비오나 스토이치코프가 비록 4강에서 멈췄지만 엄청난 활약으로 팀을 멱살캐리했고 순수 퍼포먼스는 어지간한 우승자들을 씹어먹을 정도이기에 아무도 국대무관이라 뭐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유관/무관보다는 뭘 보여줬는가? 얼마나 활약했는가?가 핵심이다. 크루이프가 만약 74월드컵 결승전 딱 한경기만 잡았다면 펠레와 마라도나의 반열에도 오를법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니 그의 실력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1974년 월드컵에서의 임팩트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9.2. 축구계에 끼친 영향[편집]
바르셀로나를 재탄생시킨 남자
The Man Who Reinvented Barcelona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인을 꼽으며 남긴 평
크루이프의 특기할 점이라면 선수로나 감독으로나 최고의 평가를 받았고, 토탈 풋볼의 전도자라는 점과 그에 기인한 축구관이다. 필드 플레이어 전원이 공격 및 수비 가담을 하는 토탈 풋볼이라는 전술의 혁명, 바르셀로나 하면 떠오르는 '패스, 점유, 압박'이라는 팀 컬러. 이것이 바로 크루이프가 축구계에 남긴 것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IFFHS는 크루이프를 20세기 유럽 최고의 축구 선수로 선정하였다.
또한 유스 시스템으로 흥한 아약스 출신답게, 팀을 맡자마자 유스 시스템을 정비했다. 덕분에 오늘날 농담 삼아 믿고 쓰는 바르셀로나 유스라고 할 만한 기틀을 마련했다. 선수로써 맹활약했을 뿐더러 감독으로써도 바르셀로나의 '라 마시아'와 같은 육성 시스템을 정립하였기에 네덜란드인임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9.3. vs 프란츠 베켄바워[편집]
자세한 내용은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4. 게으른 천재[편집]
크루이프는 엄청난 게으름뱅이에다 골초였다고 한다. 훈련은 죽도록 싫어하고 연습도 거의 안 했다고 한다. 선수 시절 경기에 뛸 때도 하프타임만 되면 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어느 네덜란드 감독은, 인생의 불공평을 언급할 때 크루이프를 예로 들며 "훈련은 죽도록 싫어하지, 몸 관리도 대충 하지, 담배는 뻑뻑 피워 대는 놈인데도 타고난 재능 하나만으로 세계 최고다."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으며, 스승인 리누스 미헬스과의 다음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미헬스: "요한! 너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자질이 있어. 그러니 담배를 끊고 나를 따라라. 제대로 훈련을 해라! 내가 널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주겠다!"
크루이프: "그딴 거 안 해도 난 이미 최고의 선수인데요?"
미헬스: "당대 최고가 아니라 그 이상, 펠레를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고!"
크루이프: "획일적인 교육론은 선수의 재능을 죽이는 법이죠."
스승 리누스 미헬스과의 일화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요한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 감독이 되고 난 후 제자였던 미카엘 라우드루프에게 "너는 항상 80~90%의 노력밖에 안한다. 네가 빈민가에 태어나서 오직 축구 하나만 보고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절실함에 재능을 100% 발휘한다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다."라고 갈궜다.[78] 그리고 라우드루프는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 양측을 합해 5번의 리그 우승을 경험하며 199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79]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안 하고 논다고' 욕을 먹던 라우드루프는 스완지 시티 AFC의 감독이 되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축구에 헌신하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다.[80]
그리고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의 자신의 젊은 시절과 똑같은 게으른 천재같은 선수를 만나는데, 그 선수가 호마리우. 한 번은 휴가를 보내 달라고 조르자 빡쳐서 "다음 경기에서 해트트릭 하면 보내줄게!"라고 말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호마리우는 휴가를 즐기러 간다. 그런데 그 해트트릭을 넣은 상대팀이 레알 마드리드. 다시 말해 엘 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을 했다. 더 무서운 건 호마리우는 3골 말고도 1어시스트까지 기록했다. 그날 경기는 바르셀로나의 5:0 대승.
또 바르셀로나 다큐멘터리에 나와 인터뷰에서 밝힌 일화가 있다. 대부분의 축구팬이라면 론도(수비선수 몇명을 가운데 두고 선수들이 둥글게 서서 볼을 돌리는 훈련)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이 운동을 바르셀로나에 도입한 인물이 바로 선수시절 크루이프인데, 그가 인터뷰에서 웃으며 말하길 그 운동을 도입한 것도 열심히 뛰어다니는 훈련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게으른 선수의 이미지와는 달리 밑의 야구에 대한 일화에서 보듯 아예 불성실한 선수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에 열중하던 사람이다. 그의 축구관에서 체력 훈련이 중요하지 않았을 뿐. 그가 구현하던 토탈 풋볼은 전례 없이 체력보다는 책임 아래의 자율성을 강조하던 축구를 하였기 때문에 게으른 선수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다. 또한 크루이프는 이론보다 경험을 중요시하는 쪽이어서 요즘으로 치면 자율적인 몸관리를 하는 프로선수를 보고 게으르다고 한 꼴이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시각으로 봐도 결국 축구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도 다리에 쥐가 나고 심장이 터질듯 뛰어다니면서. 아무리 그가 지략적인 관점에서 부지런하게 공부를 했다고 한들, 평균 이하의 체력훈련과 골초급으로 담배를 피워댔음에도 그라운드를 20년이나 쌩쌩 달렸다는 것 만으로도 타선수들 입장에선 부러움의 대상이자 게으른 천재 그 자체다.
물론 축구 선수라는 체력적으로 어마어마한 무리를 떠안는 직업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워댄 결과는 말년의 폐암이었고 이는 그의 목숨까지 앗아간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다.
10. 여담[편집]
- 선수 시절 주로 단 등번호는 '팀 에이스 번호'와는 거리가 먼 14번이다. 14번을 달게 된 이유가 특이한데, 아약스 시절 동료 게리 뮤렌이 라커룸에서 경기 직전까지 자신의 7번 유니폼을 찾지 못하자 크루이프가 자신의 9번 유니폼을 주고 14번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14번은 AFC 아약스의 영구결번이 되었다.
-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현역 시절 샤프하게 잘생긴 얼굴로 인기를 끌었다. 다음은 송기룡 축협 홍보실장이 처음 크루이프를 알게 되었을 때의 일화.
- 10세의 어린 나이에 아약스 아카데미에 입단했으나 처음에는 야구를 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야구를 하기도 했다.[81] 포지션은 포수. 그러나 5년 후 코치가 축구를 선택하라고 촉구했고, 그는 축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 이러한 영향인지 자신이 감독 시절 야구에서 배운 것을 축구에 접목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기도 했다.
나는 야구에서 집중적으로 배운 세부적인 부분들을 나중에 축구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했다. 투수의 투구를 결정하는 사람은 포수다. 투수는 필드 전체를 볼 수 없지만 포수는 볼 수 있다. 또 포수는 투수의 공을 받아 어디로 던질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공간과 모든 선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감독도 나에게 공을 받기 전에 그 공을 어디로 패스할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프로 축구선수로 뛰면서 어린 시절 야구에서 배운 것, 즉 언제나 경기장 전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떠올렸고 그것이 나의 강점이 되었다. 야구는 훈련으로 재능을 키울 수 있는 대표적인 스포츠로, 축구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순간 스피드, 슬라이딩, 공간 인지력이 요구되는 것도 그렇고, 한 수 앞서 생각하고 여러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는 론도 훈련[82] 을 토대로 하는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 축구'와도 일맥상통한다.
내가 야구를 축구에 잘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뒤로도 야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감독 시절 나는 야구의 교훈을 축구에 아주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축구에서 미리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야구도 그렇다. 몇 분의 일 초 사이에 공간과 가능성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야구를 잘하려면 주자와 홈 사이 거리를 판단하고 주자가 들어가기 전에 공을 홈으로 보내야 한다. 전술 면에서도 배운 바가 있다. 옳은 결정을 내렸으면 그것을 기술적으로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후략)
《마이 턴》(my turn) 中
- 1974년 서독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의 스폰서이던 아디다스가 독일 기업인 것을 알고 세계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공격한 국가의 기업 스폰은 받을 수 없다면서 나홀로 삼선 유니폼이 아닌 이선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크루이프는 푸마의 스폰싱을 받는 선수였고 푸마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아디다스 삼선의 한 줄을 떼고 경기한 것이다.[83] 이는 나중에 크루이프의 아이덴티티가 되기도 했다.
- 1974년 서독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크루이프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크루이프 위주로 팀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크루이프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선수들이 죄다 국가대표팀에서 퇴출되었다. 대표격으로 PSV 에인트호번 소속의 얀 반 베베른과 빌리 판데르카윌런이 있는데 이들은 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루이프와의 불화로 대표팀에서 퇴출되었다.
-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다혈질의 '미친 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와 역시 멘탈로는 어디서 절대로 지지 않았고 별명이 심지어 'animal'이었던 호마리우가 서로 팀의 넘버원이라고 투닥거렸다. 이를 보던 크루이프는 "놀고들 있네. 내가 감독이니까 내가 최고다. 그러니까 제발 말 좀 들어"라며 논쟁을 종식시키려 했으나 저 둘이 어디 말 들으라고 들을 인물들인가. 결국 서로 공을 10번 차서 크로스바 맞추는 내기를 하기로 했다. 다른 선수들도 간만에 흥을 돋울 거리가 생기니 승부에 관계없이 모두 참가했다. 결과는 스토이치코프 2번, 호마리우가 3번. 이에 호마리우가 자기가 최고라고 나대자 크루이프는 단숨에 6번을 성공시켰다. 호마리우가 인정할 수 없다고 개기자 가만히 듣던 크루이프는 갑자기 왼발로 공을 냅다 갈기는데 그게 그대로 크로스바에 적중했고 호마리우는 바로 아닥했다고 하며, 몇년 후, 크루이프는 이 일화를 밝히면서 마지막 슛은 뽀록이었다고 자백했다.
그럼 그 전 6번은...
-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토탈 풋볼을 시도할 당시 워낙 전례가 없던 전술인 만큼 감독이나 선수나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는데, 특히 선수들은 빡센 체력 훈련에 죽어나는 판국이었다. 정작 크루이프는 토탈 풋볼은 체력이 아니라 테크닉과 공간이며, 체력을 아끼는 전술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토탈 풋볼은 점유율을 높게 가져가면서 체력을 아끼고 압박 시간을 줄이는 형태의 축구다. 그리고 측면, 중앙 등에서 공을 돌리다 보면 자연적으로 상대의 압박이 거세어져서 볼을 빼앗기고 마는데 그것을 극복해내는 것이 바로 탈압박이다. 탈압박의 전제가 되는 것이 볼을 다루는 기술 즉, 테크닉인 것이다.
-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마른 체형 때문인지 '갈비'라는 별명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 자신의 축구관을 결코 굽히지 않아서 설화도 자주 일으켰다. 물론 달리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독 개인의 신념에 관한 것이니, 몇 번은 망신을 톡톡히 당하기도 하고 몇 번은 상대를 관광보내기도 했다.
- 크루이프가 완벽히 농락당한 유명한 사례는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AC 밀란과의 결승전이다.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인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AC 밀란에게 0:4로 완패당하며 드림팀이 붕괴됐다. 게다가 당시 AC 밀란은 프랑코 바레시와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가 경고 누적으로 결장했고, 마르코 반 바스텐은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이 생겼는지 경기 전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드사이 같이 형편 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라는 크루이프의 어록이 떠돌기도 하는데 출처 불분명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글이다. 실제 발언은 요약하자면 "바르셀로나야말로 최고의 우승후보이며, 밀란은 그렇지 못하다. 바르셀로나는 공격적이고, 밀란은 수비적이다.[84] " 정도의 내용이었다.[85] 허나 결과적으로 특별한 점이 없는 밀란의 공격수 다니엘레 마사로에게 전반에만 2골을 먹고 후반에는 데얀 사비체비치에게 1골, 마지막으로 마르셀 드사이에게 1골 먹으며 참패했다.
- 주제 무리뉴가 이끄는 인테르를 두고 안티 풋볼 드립을 쳤다. 과거 첼시 감독 시절부터 무리뉴와 크루이프는 설전이 이어졌는데, 무리뉴한테 "넌 그저 트로피나 수집하는 기계일 뿐이지!"라고 디스를 걸었고, 무리뉴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2010/11 코파 델 레이를 우승한 후 "난 트로피만 수집하는 감독이 되는 게 참 좋다"라고 응수했다. 화가 난 크루이프가 "넌 스페셜 원이 아니라 선수 시절 별 볼 일 없는 듣보잡이었다"라고 응수하니 무리뉴는 "아직도 과거 속에 사는 크루이프에게서는 전혀 배울 게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4:0으로 질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라고 크루이프 속을 팍팍 긁었다.
-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예전의 브라질과 전혀 다른 수비 축구, 점유율 축구를 들고 나온 둥가 감독에게 "수비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그들은 더 이상 돈 주고 볼만한 가치가 없는 팀"이라는 디스를 날렸다. 이에 둥가 감독은 "싫으면 보지 마라"고 맞디스를 했으나 결국 네덜란드에게 2:1로 패했다.
- 본인만의 아트 사커 축구 철학이 얼마나 철저한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조국 네덜란드조차 그의 비판을 피하진 못했다. 크루이프는 스페인과 결승전에 앞서 "나는 당연히 내 조국이 우승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네덜란드 축구는 아름답지 않다. 내가 만들기 위해 노력한 토탈 풋볼을 그들은 버렸다. 반면 스페인의 축구는 내 축구다.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축구가 이제 결실을 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페인이 우승하기를 바란다"라고 발언했고, 그 말이 이루어졌다. 물론 일부 네덜란드 팬들에겐 대안없이 그저 비난만 하는 늙은이라고 욕도 먹었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축구 스타일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다. 참고로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바티스투타는 특별히 크루이프에게 밉보일만한 일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기대 미만의 성적을 내자 바티스투타에게 대놓고 "너 때문이다. 바티 너 자체가 패배다"라며 디스를 날렸다. 애초에 "바티스투타는 패스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라며 싫어했다.
- 물론 독설만 하는건 아니라, 에르난 크레스포에 대해선 "크레스포는 2인자로 썩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재원이다. 특히 1인자가 바티라면 더더욱 아까운 재원이다. 내가 1998년 아르헨티나 감독이었다면 크레스포를 주전으로 기용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우승은 프랑스가 아니라 아르헨티나가 차지했을 것이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실제로 크레스포의 스타일은 현대 축구에서 가장 희귀하다고 평가받는 컴플리트 포워드 스타일이라서 오히려 후대에 고평가받았다.
- 2010년대 초 인터뷰에서 친정팀 아약스를 비난했는데, 그 내용이 "나의 아약스는 그러지 않아!"로 카탈루냐(바르셀로나) 덕후임을 인증했다.
- 2014년 들어서 바르셀로나의 축구 스타일 변화에 실망을 표했다. 크루이프는 라포르타 재임 시기인 2010년부터 명예회장으로 있었는데, 산드로 로셀이 취임하면서부터는 구단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로셀이 횡령사건으로 사임한 이후에도 구단에 복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구단이 재정적인 이유로 유니세프 로고를 포기하거나, 티키타카로 대표되는 토탈 풋볼을 손 보려는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클럽의 진짜 문제는 팀 내부에 있어야 알 수 있다. 어떤 부분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고, 그 부분을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난 바르사 내부의 사람들과 접촉을 이어가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봐서는 구단 내부 복귀를 노리는 듯한데, 결과적으로 구단 내부 복귀는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했다.
- 2010년대 중반 주제프 마리아 바르토메우 회장 체제의 바르사 역시 그의 지적을 피할 수 없었는데, 네이마르의 이적에 관한 비판도 있었지만, 바르토메우에 대놓고 적대적이었고, 2015년 회장선거 때도 공개적으로 라포르타를 지지했다. 이 움직임에 팬들 사이에서도 간섭이 심하다 vs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소리다 로 말이 갈렸지만, 이후 바르토메우와 그의 측근들이 바르사 역대 최악의 행보를 보여주고[86] , 네이마르는 구단과 이사회를 가지고 논 것도 모자라[87] 팬들에게도 빅엿을 먹이고 떠났기에, 결과적으론 크루이프의 말이 옳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 소위 축구계 최고 레전드 선수라는 펠레, 마라도나가 딱히 머리가 뛰어난 인상은 아니기 때문에 전술가로서도 대성한 크루이프가 뇌지컬적인 측면에선 유독 특출나 보이는 면이 있다. 펠레 같은 경우는 펠레의 저주식 망언으로 유명하며 마라도나 역시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평판이 많은데 비해 크루이프는 감독으로서도 대성했고, 무엇보다 축구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던져놓았다 보니 선수 이후의 커리어까지 생각하면 축구 현역계에선 크루이프가 나름 장수한 인물이긴 하다.
- 1991년에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할 당시 찍은 금연 홍보 광고.
담배는 축구가 나에게 준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선수 시절부터 매일 20개비씩 피운 담배 때문에 건강을 해쳐 결국 1991년 2월 27일에 FC 바르셀로나 감독 재임 당시 심장우회수술을 받고 난 뒤 금연하여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했지만 이 후에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라커룸에서 기자들과 인터뷰 중에도 담배를 피워대다 두 차례 심장 수술을 더 받은 후에 담배를 끊었다.
그가 출연한 금연 홍보 광고 대사 중에서.
- 츄파춥스로도 유명하다.[88] 수술을 받고 담배를 끊기 위해서 크루이프는 츄파 춥스를 물었고, 이 모습은 TV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리고 2016년 4월 3일, 바르사는 이 날의 경기를 보러오는 사람들에게 크루이프의 추모를 위해 츄파춥스를 건내주기도 했다.
- 페예노르트 시절 PSV 선수였던 허정무와 대결하기도 했다. 무릎팍도사에서 허정무가 과거를 회상할 때 크루이프의 거친 플레이로 코뼈 골절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팬들이 국민 영웅이었던 크루이프에게 야유를 퍼부어 감동을 먹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이천수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수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천수가 크루이프 빠돌이라 존경하는 선수를 묻는 질문에 "오직 크루이프"라고 답했더니 "한국 선수들은 존경 안 한다"고 기사가 나왔다.
- 그의 아들 조르디 크루이프도 전직 축구 선수로 아버지가 감독으로 있던 바르셀로나에서 데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UEFA 유로 1996에 뛰기도 하고[89]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뛰었지만, 잦은 부상으로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잊혀진 유망주 취급을 받다가 라리가의 데포르티보 알라베스로 이적, 팀을 UEFA컵 준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90] 이름 요르디(Jordi)도 카탈루냐의 성인(聖人)의[91]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카탈루냐 대표팀으로도 뛰었다.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아비브의 단장 직을 맡고 있다가 현재 바르셀로나의 국제 스카우트 이사를 맡고있다.
- 뜬금없는 일이긴 한데 그의 사위였던 헤수스 앙고이가 월드리그 미식축구 리그의 바르셀로나 드래곤스에서 키커로 활약한 적이 있었다.
- 박지성이 맨유로 이적할 때 도움을 준 적이 있다.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하기 전 워크 퍼밋 발급 때문에 이적 과정에서 문제가 한번 발생했는데 워크퍼밋이 나오려면 2년간 열린 국가대표 경기 중 75% 이상을 뛰어야하지만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박지성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선수 보호 차원에서 부르지 않았던 경기가 여럿 있었고, 그 결과 64% 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나머지 방법인 유명 축구인 3명에게 추천서를[92][93] 받아야 했는데, 원 소속팀 감독인 거스 히딩크와 이적팀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 말고도 1명이 더 필요했는데 박지성과 조금도 접점이 없었던 크루이프가 써줬다. 그 이유는 2004-05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박지성의 플레이를 보고 감명받아서였다고. 물론 뜬금없이 나선 것은 아니고 같은 국적인 히딩크에게서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지만, 크루이프의 평소 남 눈치 보지 않는 성격을 생각하면 꼭 히딩크의 부탁때문에 추천서를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해당 경기를 보고 박지성에 대해 극찬을 하기도 했고. 어찌됐든 박지성은 워크 퍼밋 발급에 성공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된다.
- 젊은 시절 모습이 루카 모드리치와 닮았는데, 플레이 스타일마저 비슷하고, 자신의 조국을 준우승시킨 것까지도 똑같다. 모드리치도 크루이프를 우상으로 삼았을 정도다.[94] 비교하자면 크루이프는 좀 더 공격적이였고, 모드리치는 사비 쪽에 가까울 정도로 조율하는 쪽에 특화되어 있다.
- 2020년 프랑스 풋볼이 선정한 발롱도르 드림팀에서 의외로 스트라이커 보직에서 호나우두에게 밀려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월드컵 우승에 비중을 둔 탓인지 크루이프의 퍼스트팀 탈락을 두고 비교적 무난한 편이라는 타 포지션 대비 가장 큰 논란이 일기도 했다.[95] 물론 호나우두도 전성기가 짧아서 문제였을뿐 전성기 기준으론 퍼스트팀에 들만한 역대급 선수이긴 했고, 세컨드팀도 보면 알겠지만 그 위상이 결코 작진 않다. 결국 자리가 모자라다보니 이런 불필요한 논쟁도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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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70년대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 1위에 각각 이름을 올렸다.
- 1978년 첫 은퇴 후 아약스의 기술 고문으로 재임할 당시 아약스가 트벤터에게 1:3으로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다못해 전반 30분에 벤치로 내려가 당시 아약스의 감독이었던 레오 베인하커르의 옆에서 직접 선수들에게 전술 지시를 내리며 팀을 진두지휘해 5:3 역전승을 이끌어낸 전설적인 일화가 있다.
-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탓에 크루이프와 함께 훈련을 하는 선수들은 지적 받고 욕먹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고 한다. 특히 자신이 아끼고 기대를 거는 선수에게는 더욱 엄격했다고 하는데 마르코 반 바스텐은 크루이프에게 독설을 듣고 울면서 훈련장을 나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며 헤랄트 파넨뷔르흐는 이 때문에 팀을 떠났고 요니 렙 또한 훗날 인터뷰에서 크루이프에게 많은 걸 배웠지만 크루이프의 완벽주의 성향은 싫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완벽주의에, 괴팍한 성격 덕분에 바르사 감독 시절 길들이기 쉽지 않은 유형의 선수들인 '미친 개' 스토이치코프와 'animal' 호마리우를 통제할 수 있었다.
[각주]